2025 F/W 오트쿠튀르 하이라이트 #2

- 뎀나의 마지막 인사와 글렌 마틴스의 데뷔, 하우스의 정체성이 새롭게 정의된 순간들 - 발렌시아가 · 메종 마르지엘라 · 엘리 사브 · 로버트 운

2025-07-10     김민정 에디터

하우스와의 작별부터 찬란한 데뷔 무대까지, 디자이너들의 전환점이자 브랜드의 정체성이 새롭게 정의된 25FW 파리 오트 쿠튀르 위크의 상징적인 순간들을 소개한다. 

 

발렌시아가

뎀나는 54번째 오트 쿠튀르 쇼를 끝으로 발렌시아가에서의 10년 여정을 마무리했다. 쇼는 팀원들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처럼 구성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작됐고, 블랙과 화이트를 기반으로 한 구조적인 드레스에 절제된 실험성과 정교함이 어우러진 룩들이 이어졌다.

이번 쇼는 마치 뎀나가 만들어낸 발렌시아가 유니버스를 기념하는 미니 회고전처럼 느껴졌다. 소용돌이치는 듯한 블루 파카를 입은 리사 리나, 깔때기 형태의 LBD를 입은 케이티 페리, 팬츠부츠 위로 푸시아 뷔스티에를 매치한 브라이언 보이, 그리고 2021년 발렌시아가×구찌 해킹 프로젝트를 연상시키는 보석 장식 로고 수트를 입은 프레드릭 로버트슨까지, 모두가 뎀나의 유산을 입고 등장해 쇼의 의미를 더욱 선명히 각인시켰다.

 

Blenciaga Fall 2025 Couture

런웨이 위 룩들은 그런지한 감성이나 불안 대신, 정확한 실루엣에 집중한 절제된 조형미로 응축됐다. 보머 재킷과 트렌치코트, 여성스러운 수트, 낡은 할리우드풍 드레스까지, 날렵하고 정제된 뎀나의 아이코닉한 피스였다. 

현장에는 케어링 CEO를 비롯한 주요 임원들, 나오미 캠벨과 카디비, 그리고 후임자인 피엘파올로 피촐리까지 참석해 뎀나의 마지막 무대를 응원했다. 뎀나는 이번 쇼를 끝으로 발렌시아가를 떠나,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새 출발할 예정이며, 2026년 3월 첫 쇼를 선보인 뒤, 같은 해 8월 밀라노 패션위크에서는 브랜드 정체성을 재조명할 프레젠테이션도 계획하고 있다.

 

메종 마르지엘라

Maison Margiela Fall 2025 Couture

이번 쿠튀르 시즌, 가장 큰 기대를 모은 쇼 중 하나는 글렌 마틴스의 데뷔작, 메종 마르지엘라 2025 아티즈널 컬렉션이었다. 존 갈리아노의 10년 재임 이후 처음으로 아티즈널 라인의 지휘봉을 넘겨받은 마틴스는, 하우스의 아카이브를 과감하게 재해석하며 새로운 서사를 펼쳐보였다. ‘No.2’라는 타이틀 아래 선보인 컬렉션은 디컨스트럭션, 익명성이라는 마르지엘라의 철학을 견고히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조형적 미학을 더해낸 것이 특징이다. 

 

Maison Margiela Fall 2025 Couture 

쇼는 마르지엘라가 마지막 무대를 올렸던 2008년의 장소에서 열렸다. 오프닝 룩으로 등장한 1992년 플라스틱 드레스의 재현은 아카이브에 대한 선명한 오마주를 드러냈고, 마르지엘라의 시그니처인 마스크는 주얼리와 텍스타일로 재해석되었다. 트롱프뢰유, 드레이핑, 지속 가능한 소재가 어우러진 실험적 조형은 해체주의적인 시각적 긴장감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아티즈널 라인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로버트 운

Robert Wun Fall 2025 Couture

어딘가 오싹한 기운을 풍기는 로버트 운의 컬렉션.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디자이너 로버트 운은 지난 몇 시즌간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미학을 공고히 해왔다. 이번 시즌 역시 그의 창의력은 멈추지 않았다. 피 묻은 손자국이 새겨진 새틴 드레스, 어깨와 허리를 감싸거나 불쑥 튀어나온 가짜 팔이 더해진 구조적인 룩까지, 극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쇼는 파리의 테아트르 드 샤틀레(Théâtre de Châtelet)에서 막을 올렸다. 관객들은 어둠 속을 지나 입장했고, 블랙 카펫 위로 룩들이 예기치 않게 등장하며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영감은 종종 영화에서 비롯되곤 하지만, 이번 시즌은 조금 달랐다. 출발점은 바로 지난해 멧 갈라(Met Gala) 백스테이지에서 겪은 혼란과 긴장감. “사람들이 원하는 존재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풀어보고 싶었어요.” 그는 타인의 기대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옷과 스타일링을 통해 하나의 시각적 서사로 풀어냈다. 

 

엘리 사브

Elie Saab Couture Fall 2025

엘리 사브는 ‘The New Court’라는 타이틀 아래,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이며 미니멀리즘 시대의 끝을 우아하게 선언했다. 핑크, 피스타치오, 민트 등 몽환적인 파스텔 톤과 함께 흐른 보우 와우 와우(Bow Wow Wow)의 ‘I Want Candy’는 쇼의 무드를 더욱 선명히 각인시켰다.

 

Elie Saab Couture Fall 2025

패니어를 연상시키는 볼륨 스커트, 드라마틱한 망토, 18세기식 퀼로트를 위트 있게 재해석한 팬츠 수트까지, 풍성한 실루엣이 런웨이를 수놓았다. 여기에 프랑스 아틀리에에서 공수한 레이스, 자카드, 실크 가자르에 오버레이와 아플리케를 더해 클래식한 소재들이 생동감 있게 재해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