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패션위크의 상징적인 인물로, 모든 행보마다 화제를 모았던 버질 아블로(Virgil Abloh). 런웨이를 넘어 수많은 브랜드와 협업해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전시나 DJ 등을 통해 예술 전반에 짧지만 강렬한 궤적을 남겼다. 버질 아블로의 이러한 창조적 정신이 유럽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회고전 <Virgil Abloh: The Codes>를 통해 되살아난다. 나이키와 버질 아블로 아카이브가 공동 주최한 이번 전시는 스니커즈 200켤레를 포함해 그의 작품, 소장품, 미공개 작업물 등 총 1,000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그의 45번째 생일이었던 지난 9월 30일 프랑스 파리 그랑 팔레에서 열렸다. 오는 10월 9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워크숍, DJ, 영화 상영, 나이키 앰베서더 스포츠 스타 및 디자이너들이 참여하는 토크, 그가 애플뮤직과 함께했던 ‘텔레바이즈드 라디오(Televised Radio)’의 부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포함한다.
큐레이터 클로에 술탄(Chloe Sultan)과 마푸즈 술탄(Mahfuz Sultan)은 이번 전시를 버질 아블로의 창작 과정을 반영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표 협업 작품인 ‘에어 조던 1’, 은빛의 루이 비통 ‘모노그램 위켄더 백’, ‘Gradient’와 ‘Efflorescence’ 체어, 크롬하츠의 목재 벤치로 전시를 시작한다. 여기에 그의 첫 브랜드 ‘Pyrex Vision’ 로고가 새겨진 플란넬 셔츠가 통해 커리어의 출발을 상기시킨다. 이어서 그가 협업한 에비앙, 바카라, 브라운, 이케아, 비트라 등의 작업물도 전시했다. 천장까지 설치된 선반에는 티셔츠 더미, 가방, 교통통제 콘, 시그니처 산업 벨트가 쌓여 있으며, 프로토타입 디자인과 턴테이블, 다양한 서류를 통해 그의 책상을 재현함으로써 아이디어의 과정을 드러냈다. 클로에 술탄은 “대표작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전시의 심장은 아카이브 섹션이에요. 그는 늘 완성작뿐 아니라 창작의 배경까지 보여주었으니까요”라고 전시의 의도를 덧붙였다.
특히 생전 버질 아블로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폐쇄적인 디자인 세계를 젊은 세대에게 열어주는 일이었다. 2020년 그는 패션 스칼라십 펀드와 함께 흑인 패션 학생들을 위한 ‘Post Modern’ 장학금, 100만 달러 규모의 기금을 설립했다. 클로에 술탄은 “그는 장벽을 허무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았어요. 자신의 디자인 코드를 나누고, 자신의 창작 방식을 체계화해 구현하는 방식을 공유했죠. 그는 늘 후배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마치 17살의 자신에게 길을 일러주듯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후원을 개척해왔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전시작은 2만여 점의 아카이브 중에서 선별됐다. 버질 아블로는 10대 시절부터 자신의 작업을 보존했고, 식당 냅킨에 남긴 낙서조차 모아왔다. 마푸즈 술탄은 “이번 전시는 그의 아이디어가 개념미술에서 팝 컬처까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동일한 체인 형태가 바카라 글라스와 루이 비통 백에 동시에 쓰이고, 건축 자재가 여러 브랜드에서 반복되기도 하죠. 그의 작업은 개별 프로젝트가 아니라 전체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전시에는 그가 커리어의 초기 운영했던 콘셉트 스토어 꼴레트(Colette)를 부활시키는 아이디어도 포함됐다. 당시 구매·이미지 디렉터로 함께했던 사라 안델만(Sarah Andelman) 역시 2008년 꼴레트에서 처음 판매된 아블로의 티셔츠 복각판을 입고 전시장을 찾았다. 이번 전시 한정 상품으로는 꼴레트 시그니처 향초와 아블로가 재해석한 브라운 알람시계를 포함하기도 했다. 사라 안델만은 “그의 유산은 경계를 허문 데 있습니다. 패션, 신발, 건축, 음악, 디자인, 회화, 조각까지 자유롭게 넘나들었죠. 종이 클립을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목걸이도 만들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태도가 지금도 큰 울림을 줍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아내이자 아카이브 회장 겸 재단 설립자인 섀넌 아블로(Shannon Abloh)에게도 큰 의미였다. “지난 4년간 그의 모든 것을 모아 보존하고, 세상과 나눌 수 있도록 준비해왔습니다. 그것을 파리에서, 그의 생일 주간에, 패션위크와 함께 선보이는 건 큰 보람이에요.”
루이 비통의 후임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와 DJ 벤지 B(Benji B)를 비롯해 수많은 동료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개막 직전까지도 옛 동료들이 소장품을 보내왔는데, 어느 참석자는 그와의 이야기가 담긴 베개 커버 한 장을 전달하기 위해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기도 했다. 클로에 술탄은 “가장 뜻깊은 건 사람들이 다시 모여 서로의 기억을 나누는 순간이에요. 버질은 언제나 연결자였고, 그의 존재만으로도 방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그걸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지만, 이번 전시는 그 감각에 가장 가까운 자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했다.